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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민일보>영안교회 양병희 목사 “요나처럼 다른 길 걷다가 금식기도 끝에 신령의 눈 떠” 
등록자 공동관리 등록일 2012.08.16 11:19:28 접속수 6,410
나는 1953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철저한 유교집안이었던 우리 집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외삼촌 덕분이다. 외삼촌의 전도에 2남4녀 중 누님이 먼저 교회로 향했고 그 다음이 나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교회 가시는 날부터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동네 성결교회를 다녔다. 100여명이 모이는 교회였는데 시골교회인지라 주일학교 설교는 항상 부장교사를 맡고 있던 이동권 장로님이 하셨다. 전형적인 농사꾼이었던 이 장로님은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어린이들을 사랑스럽게 꼭 안아주시곤 했다. 초등학교 5학년 고난주간의 일이다. 구속의 은혜에 감격해 울먹이면서 하시던 이 장로님의 십자가 설교는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더러움을 용서하시기 위해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고 우리의 잘못된 행실을 용서하시려고 양손과 양발이 못에 찔리셨어요. 그리고 주님이 옆구리에 창을 받으신 것은 우리 마음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장로님은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으시면서 십자가 사랑을 전했다. 장로님이 우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구원의 확신은 방황의 시기 나를 지탱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던 시골 아낙네였던 어머니는 새벽기도 한 번 안 빠지고 예수를 믿는 우직스런 모습을 보이셨다. 오전 4시 새벽기도를 다녀온 어머님이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병희야, 너만 놓고 기도하면 강단에 물고기가 우글거리는 모습이 보이고 네가 그물로 그걸 잡는 게 보인다. 아무래도 네가 목회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목회자가 되는 게 싫었다. 다니던 교회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마다 목회자가 교체됐고 그럴 때마다 많은 상처를 받았다. 이런 기억도 있다. 과격한 몇몇 성도는 목회자를 내쫓기 위해 서명서에 도장을 받으러 다녔다. 하루는 이분들이 우리 집을 찾았다.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어른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봤는데 어머니는 그분들을 붙잡고 울면서 “제발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애원하셨다. 충격적이었다. 또 목회자 자녀가 당하는 고통이 너무 싫었다. 공부를 꽤 잘하던 그 친구는 등록금이 없어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등록금을 대신 내주시고 쌀을 퍼서 갖다 드리기도 했다. 이것은 한때 내가 교회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 결정타가 됐다. 교회 분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좋았지만 교회는 싫었고 목회자는 초라해보였다. 한국교회가 정말 다음세대를 키우고 싶다면 부모들이 조심해야 한다. 절대 자녀들 앞에서 교회의 부정적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이것은 자녀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목회자나 직분자를 비하하는 것은 자녀들의 교회관을 비뚤게 한다. 자녀가 목회자와 직분자를 우습게 여기게 되고 훗날 교회의 문제아가가 된다. 중학교 때 키가 174㎝일 정도로 덩치가 컸다. 사춘기 시절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신앙생활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술과 담배를 배우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려고 애를 썼다. 큰 사고도 여러 번 쳤다. 그렇게 불량스럽게 다니면서도 ‘교회 욕은 하지 말라’고 했다. 교회를 가다 말다하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기도는 나를 다시 교회로 이끌었다. 어쨌든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의 이야기가 부담스러워 큰 사명감도 없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신학을 하게 됐다. 1978년 감신선교대학원에 재학하면서 교육전도사로 일했다. 그러나 확실한 소명감도 없이 목회가 될 리 없었다. ‘이렇게 부교역자로 일하기보다 큰돈을 벌어 장로가 돼 교회를 섬기겠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친척의 도움으로 의류와 테니스라켓 사업을 했는데 제법 큰돈을 벌었다. 특히 일본 야마하 테니스 라켓 주문을 받아서 제작하는 사업이 꽤 쏠쏠했다. 주변에 개척하는 목회자들에게 강대상을 해주면서 나름대로 위안을 받았다. 위기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왔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사회가 혼란에 빠졌고 ‘한국에 전쟁이 난다’는 루머가 돌았다. 당시 테니스 라켓 케이스를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던 때다. 일본 바이어들이 이 소문을 듣고 거래는커녕 한국을 떠나버렸다. 받았던 어음이 부도가 났고 사업은 한순간에 걷잡을 수 없이 기울었다. 그때 떠오른 게 사무엘상 2장 6∼7절 말씀이다. 정말 생사화복의 열쇠가 하나님께 있음을 철저히 깨달았다. 출구가 없었다. 고통스러웠다. 근데 본질적으로 물질적 고통이 아니었다. 사명의 갈등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목회자로 부르셨는데 내가 요나처럼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게 아닌가.’ 그리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는 잠언 16장9절 말씀이 떠올랐다. 사명을 확인하기 위해 21일 금식기도를 결단했다. 경기도 가평 한얼산 금식기도원에서 16일째 금식기도를 할 때였다. 새벽 2시쯤 마치 조명탄이 터지듯 환한 빛이 비춰졌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근데 그 사람들은 모두 검은 눈동자가 없이 허연 눈을 껌뻑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부딪히며 무질서하게 걸어갔다. 그 순간 성령께서 큰 깨달음을 주셨다. ‘네가 잘나서 내가 널 부른 게 아니다. 눈을 떴으나 보지 못하는 저들의 눈을 뜨게 하라!’ 나중에 알고 보니 12시간 넘게 의식을 잃고 입신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신비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확실한 비전이자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다. 육신의 눈, 지식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 눈, 신령한 하나님의 눈이 그래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때 깨닫게 됐다. 그날로 나 역시 영적 소경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회 방향을 확실히 했다. 기도원에서 내려와 뒤돌아볼 것 없이 사업을 모두 정리했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공장 기계를 중고시장이 아닌 고물상에 헐값으로 팔았다. 그리고 1980년 1월 13일 지하 27평을 얻어 영안교회를 개척했다. 영안(靈眼)은 신령한 눈이라는 뜻이다. 교회는 32년 만에 재적성도 2만5000명의 신앙 공동체로 성장했다. 이제 남은 사명은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민족분단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역사의식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 의욕만 지닌 사람을 사용하시지 않는다. 철저하게 준비된 사람을 쓰신다. 오늘도 사도행전 20장24절을 붙들고 시대의 희망이 되는 신앙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다. 양병희 목사 백석대 신학대학원,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고려대 북한학과를 졸업했다. 예장 백석 총회장과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영안교회 담임목사로 신망애복지재단과 영안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12. 08. 16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기사원문주소>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349020&code=231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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